초장 (이려도) 태평성대(太平聖代)

2장 저랴도 태평성대로다.

3장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로다.

4장 우리도

5장 태평성대니 놀고 놀려 하노라.

이리하여도 태평성대요, 저리하여도 태평성대요, 태평한 요순시절이로다. 우리도 태평한 시대에 놀며 가며 하노라. 성수침의 시조이다. 성수침은 우계 성혼의 아버지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14년에 현량과에 천거되었다.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와 많은 선비들이 유배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게 되자 성수침은 백악산 기슭에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초기 조광조의 도학사상은 대의명분과 요순지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도학사상을 일생 학문 탐구와 자기 수양으로 실천에 옮겼다. 그가 살았던 시절은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올곧은 그에게 그 시대가 태평성대라고 말한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기묘사화는 그의 모든 정치 생명과 신념을 일거에 앗아가버렸다. 이 때 이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가 태평성대를 간절히 바란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 시조가 냉소적이고 국외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생애와 시대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나 반어적 풍자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된다.

정가, 가곡은 16세기경부터 부르기 시작해 이 후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가곡은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 부르는데 태평가만은 남녀 병창으로 부른다. 남창과 여창의 화음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곡으로 가곡 한바탕의 대미를 장식해 연주를 마친다는 뜻으로 ‘가필주대(歌畢奏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곡은 대여음 없이 ‘태평성대’부터 바로 부르기 시작한다. ‘이려도’에 해당되는 ‘초장’의 11박은 거문고만으로 연주되고, 제12박부터 노래가 나오면서 일제히 관현 반주가 시작된다. 이 노래는 남창 가락과 여창 가락이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가락이 어느 부분에서는 만났다가도 어느 부분에서는 헤어지기도한다. 그 사이에 잠시 호흡을 다듬어 쉬기도 한다. 남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진행된다. 맨 마지막에 가서는 남녀 전부가 만나 함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그래서 남녀의 호흡과 박자가 잘 맞아야 제대로 부를 수 있다. 남녀가 일제히 무대에 나와 ’타으 펴으‘로 부르기 시작하면 무대 전체가 울리면서 꽉 차 오르는듯 금세 청중을 압도하게 된다. 지극히 느리고 화평스러우나 웅장한 면이 있는 참으로 매력적인 곡이다.

성수침은 일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안국은 그를 일컬어 ‘덕을 갖춘, 목숨을 걸고 바른 도를 지킨 사람’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빛을 남긴 이들이 많지만 성수침 같이 온후하고 고결한 이는 흔치 않다. 남녀 병창곡인 정가 태평가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하다. 그의 간절한 염원이 시대를 초월해 감응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수침이 세상을 떠날 때 집이 하도 가난하여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다.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과 쌀, 콩, 역부, 장례 제구를 제공해주었으며 사헌부집의를 증직하는 은전까지 베풀어 주었다.

이이가 행장을, 기대승이 묘지명을, 이황이 묘갈명을, 조익이 묘갈음기를 지었다. 이것은 조선 중기 학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했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청구영언』,『화원악보』에 시조 3수가 전하며 겸재가 남긴 '청송당' 그림, 성수침의 가옥으로 추정되는 것과 백악산 주변 경관이 조망된 것, 두 점이 전해오고 있다. 청송당 성수침의 집터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기상업고등학교 자리이다.

그는 글씨를 잘 썼다. 청송서라고 쓰여져 있는 보물 제 1623 호로 지정된 '성수침 필적'「방참판유령묘갈(方參判有寧墓碣」서첩이 남아 있다.

봄이면 꽃 천지이고 가을은 단풍 천지이다. 꽃은 여름을 준비하고 단풍은 겨울을 준비한다. 준비하는 마음이 꽃뿐이고 단풍뿐이겠는가. 봄에는 단풍보다 꽃이 더 아름답고 가을은 꽃보다 단풍이 더 아름답다.

봄에 듣는 태평가와 가을에 듣는 태평가는 맛도 다르리라. 젊은 사람에게는 봄에 듣는 태평가가 더 감칠 맛이 있을 것이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만추에 듣는 태평가가 더 깊은 맛이 있을 것이다. 태평가는 웅장하나 만났다 헤어지는 애잔한 면도 있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노래하는 곡 같기도 하다.

봄을 거쳐 여름을 견디고 만추에 와 자신을 비우는 유장한 노래일 듯도 싶다. 가을 벤치에 앉으면 남녀 병창의 태평가가 새들의 오케스트라에에 맞춰 저 만추의 숲 속에서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석야 신웅순

시조시인, 중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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