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결성되었던 민족음악연구회의 모토는 ‘서양음악의 비판적 수용’과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러한 모토는 젊은 세대에게는 구시대적 언어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 민족음악이란 개념을 설명하는 이 두가지 모토- 비판적 수용과 창조적 계승-는 지난 30년 동안 전통음악의 ‘현대화’나 “생활화”, “대중화”를 내걸고 이루어진 다양한 시도에 대한 가치 평가에 있어서 일관되게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

김인수_장단

근 20여년 동안 국악계의 연주자들의 대세는 ‘콜라보래이션’ 즉 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협업의 대상이나 방식을 살펴보면 매우 다양한 흐름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단순히 ‘콜라보래이션’라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의 크기나 넓이가 매우 확장되고 있다. 어떤 콜라보래이션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40대 이하 젊은 세대로 내려가면서 이제 콜라보래이션 작업은 거의 필수적인 코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30여년 전에는 산조 한바탕 혹은 산조- 정악 – 창작곡 이란 3등분으로 구성된 음악회가 보편적인 모습이었고 간혹 몇 명의 앞서나가는 연주자들이 퓨전 혹은 콜라보의 초기적 시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이제 국악계에서 연주가로 명함을 내밀려면 산조 한바탕이나 영산회상 한바탕, 혹은 고전적 컨셉이 되어버린 창작음악회 등만을 고수해서는 시대에 뒤처지는 모습으로 보이기 쉽다. 이제는 연주력보다도 더 우선시 되는게 다양한 음악문법이나 타장르와 융합시켜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 내는 기획력이라 할 수 있다. 기획력이 연주자의 ‘수신(修身)’에 매우 중요한 관문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이나 평자들에게는 연주자들이 어떤 컨셉의 공연을 올리느냐, 어떤 음악가, 혹은 타장르와 협업을 이루어내고 그 완성도를 높이느냐가 매우 중요한 관전 포인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콜라보래이션 작업에서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1990년대 모토를 새삼 떠오르게 하는 음악회가 연달아 눈에 띄는데 타악주자 김인수가 지난 5월에 시도했던 뮤지킹이 그 중 하나이다.

타악기 콘서트 <김인수의 장단소리 정면(正面)>(2024.5.26.국립극장 달오름)은 일단 제목 자체로 주목을 끌었다. ‘정면’이란 제목은 그간 산조나 판소리의 고수로서 타악 반주의 위치가 항상 연주자를 바라보며 청중과는 90도 각도의 측면만 보여주는 제한된 위치였음을 상기시키며 나아가 이제 측면이 아닌 무대 정면을 바라보도록 타악 연주를 배치함으로써 무대 공간뿐만 아니라 음악적 내용에서도 타악이 센터에서 구심점으로 작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공연을 필자는 월간 <더 무브>의 상반기 추천작 중 하나로 지목했는데, 그 이유를 단적으로 요약하면 콜라보레이션의 횡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 뿐만 아니라 1970년대부터 지난 50년간의 역사성을 응축하여 시간적 측면에서의 종적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냈기 때문이다.

이날 공연은 총 5곡으로 구성되었다. 첫곡 <기우>(祈雨)는 이예진의 창작곡, 타악 독주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이번에는 실내악으로 편곡한 곡이다. 

진도씻김굿과 경기도당굿에서 쓰인 무속 장단을 기반으로 한 곡으로 관현악 파트에 나뭇잎, 바람, 빗소리 등 자연의 역할을 묘사하는 음색적, 회화적 표현과 함께 장단의 타악적 주법을 적용하였다. 또한 김인수가 맡은 대고에 사제적 역할을 부여하는 등 음악적으로 구현한 극적 서사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실내악의 단잽이 구성으로 편곡되어 마이크 음향으로 관현악적 음색을 대체한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김인수가 무대 뒤편 중앙에서 전체 실내악단을 감싸는 ‘서번트 리더’(servant learder)로서의 제사장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관현악 협연때와는 또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날 위촉 초연된 <쇠접시와 산란광>(황재인 작곡)은 ‘꽹가리와 마주하는 새로운 태도’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곡으로 꽹과리 하나로 이루어진 독주곡이다. 프로그램북을 볼 때 꽹과리 하나로 어떻게 음악의 전개를 펼칠 것인가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곡이었다. 장단 패턴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음색과 음고로 승부를 보았다는 점에서 작곡가의 아이디어와 창작력을 높이 살만한 곡이었다. 그러면서도 리듬적 역동성을 잃지 않았다. 황재인이 현대음악과 전통음악 양쪽을 복수전공한 장점이 잘 살려져서 현대음악계에서 타악을 다루는 태도와 전통음악의 장단적 느낌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킨 곡이라 할 수 있다. 이중언어(한국전통음악과 서양 현대음악)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20대 젊은 작곡가의 창작 역량과 상상력을 가늠하게 한 뿐만 아니라 특히 나에게는 프리재즈의 대가 김대환의 원비트 개념을 소환하는 계기를 주는 곡이어서 각별하게 다가왔다. 창작곡과 전통리듬 양쪽에 능한 김인수와 황재인 합작으로 20세기 중반의 프리리듬의 타악 연주의 역사성에도 맞닿아 있고 현대음악 및 국악 필드 양쪽에서 다 통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번 연주에서 김대환 외에 강준일과 사물놀이 원년 멤버 등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선배 음악가들을 소환한 것이 필자에게 매우 남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쇠접시와 산란광>인 김대환을 소환시켰다면, <열두거리>와 <삼도장단소리>는 강준일과 사물놀이 원년멤버에 대한 오마주다. 

<열두거리>(강준일 작곡)는 1983년도에 작곡된 <열마당 열두거리>의 원제를 가진 곡으로 원래는 피아노와 사물악기의 협연으로 연주된 곡인데 이번에는 피아노와 장구의 이중주로 연주되었다. <열두거리>는 40년 전에 작곡된 곡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이미 시대를 앞서간 곡으로 피아노의 타악적 속성을 장단의 틀에 적용함으로써 피아노의 한국적 변용을 일찍이 선도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진 곡이라 할 수 있다. 

당시 40년 전에 전통연주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당굿 장단을 창작곡에 본격적으로 차용한 예는 강준일이 최초일 것이다. 이 곡은 경기도당굿 장단 중 12장단을 채택하여 피아노 주법에 적용하여 사물악기와 피아노를 혼연일체의 리듬 파트너로 만든 곡이다. 이번 연주는 전통 무속 장단과 피아노의 만남이 서양음악의 비판적 수용과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이라고 하는 1980-90년대의 시대정신을 동시에 완벽하게 구현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전범이 될만한,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고전으로 남을만한 곡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몇십년전 무대에서 김덕수 원년 멤버와 지명신 피아니스트 등 강준일 작곡가와 함께 활동했던 동세대 연주자들의 연주를 개인적으로 소환하면서 나는 깊은 울림을 받았다. 김인수는 이 작품을 스승 류경화로부터 소개 받고 악보를 통해 전수 받은 뒤 자신만의 감흥을 실었다고 했는데 40년의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두 시기를 잇대었다는 점에서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 공연의 피날레로 연주된 <삼도장단소리>에 대해서 나는 삼도농악에 무슨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을 뛰어 넘어 김인수는 구음(정은혜)과 셋드럼(김영진)과 춤이 결합하는 구성으로 21세기 버전의 삼도장단소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었다. 다스름에 해당하는 도입부에서 정은혜의 구음이 김인수, 김영진 구음으로 확대되면서 세명의 구음이 자유롭게 전개되다가 본론에서 구음이 징의 역할을, 김인수는 장구, 나머지를 셋 드럼이 맡으면서 음악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 정은혜의 구음이 이 작품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우리 전통에 고유하게 내려오는 악기 소리를 묘사하는 구음이 웬만한 악기의 역할을 능가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자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은혜의 구음과 함께 작품의 화룡정점은 무용수들의 춤이었다. 무용수들이 전통적인 장단에 걸맞는 춤사위를 함축하면서도 발레와 현대무용이 곁들여지면서 젊은 감각만이 표출할 수 있는 자유롭고 재기 발랄한 몸짓으로 삼도 농악 장단의 역동성을 풀어낸 것이다. 춤과 악기의 결합에서 보통 춤이 등장하면 악기 연주는 반주로 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하여 이번 공연에서는 춤이 음악의 리듬을 잘 들리고 공간적으로 잘 보이게끔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 하다. 특히 황태인 무용가를 알게 된 것이 이번 공연의 큰 수확이었다.

김인수는 이 작품을 사물놀이의 원년 멤버에게 헌정한다고 하였다. 사물놀이는 기존 마을 공동체에 기반했던 삼도 농악의 장단을 무대 음악에 맞게 앉은반 형태로 구성한, 그 자체로 새로운 창작품이었다. 전통적인 소재를 차용하되 당대 공연환경에 맞게 구성을 새롭게 한 것으로 당시 1970년대식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에 해당한다. 이제 사물놀이는 반세기가 지나면서 또 하나의 전통이자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사물놀이의 삼도농악을 새로운 버전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사물놀이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에 대한 ‘재현적 계승’이 아니라 ‘창조적 계승’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과제 앞에서 김인수는 장구를 기본으로 하여 구음과 춤, 셋드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편성을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감성으로 삼도농악을 탈바꿈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오마주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에 대한 사물놀이의 21세기적 버전인 셈이다.

이번 공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민족음악론이 추구했던 정신과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단단한 나무일수록 그 가지가 더 풍성해진다. 이번 음악회는 콜라보래이션의 횡적 연합만을 추구하는 젊은 연주가들에게 콜라보의 대상과 방법에 있어 종적 융합의 차원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콜라보래이션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의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남고, 나아가 작품들의 연속성이 집합된 장르가 되고 이러한 장르들이 후대에도 영감을 주는 고전으로 남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뿌리깊은 나무가 가지는 생명력과 재창조를 위한 상상력의 단단한 결합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소영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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